2020년도도 시작한지 벌써 1달이 지나 2번째 달이 되었습니다. 어떠한 길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문뜩 지하철 역안에 위치한 카페 창가에 앉아서 이 글을 쓰는데 참 많은 사람들이 제 갈길을 찾아서 움직임이 분주함을 보고 있네요. 혹시 지금 어느 길에 서 있나요? 우리는 어떠한 길을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게 더 중요한 듯 합니다. 또한 속도 역시 저희의 영역이 아니죠. 한번쯤 어디로 가는지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올해 말씀 중 가장 실천하기 쉽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한게 무엇일까요? 이미 많은 분들은 잘 하고 계실꺼 같지만 바로 성경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유와 의미는 다들 아실테니 이 글에선 안 쓰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신학자가 있어서 그 분의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익히 들어 아실만한 루터 입니다. 루터의 주장은 삶과 영성에 대한 분리로 오는 괴리감, 그에 따른 실망감 등을 겪는 시대의 문제를 집은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이야기 전에 한번 본인에게 물어보셨으면 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요? 잠시만 생각해보세요.

저는 한 때 동문서답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에게 그랬듯이, 사사들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은 많은 성경인물들이 기도로 질문할 때 항상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내가 너를 보낸 하나님이다.' 등... 하나님은 많은 성경인물들의 내가 누구이기에 그 현장으로 갑니까?에 대한 질문에 언제나 동일하게 하나님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대학때 읽었던 성경에서는 저는 하나님을 동문서답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머신(?)이 되기전부터 항상 기도의 시작에 부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에..그것을 알기에 더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없었죠.

루터가 본 하나님의 단면을 보셔야 합니다. 루터가 본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렘33:2)' 였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리고 그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우리(창1:27)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인도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도 일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일(이하 업)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업을 가짐으로써 2가지를 얻게 됩니다. 하나는 정체성입니다. 아마 세상밖에서 여러분들이 자기 소개를 한다고 생각하면 아마 본인의 업이 수식어가 됩니다. 대학생이면 대학생으로 프로그래머이면 프로그래머로.. 그리고 마지막은 업으로 부터 완수되는 사명입니다. 업을 통하여 쉬운 단어로는 보람을 느끼고, 사명을 느끼게 됩니다. 저마다의 그 느낌은 다르지만 결국은 이 사명의 끝은 세계복음화이니 걱정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루터의 이야기 전에 업에 대한 제가 정리한 것은 이랬습니다. 선악과 사건이후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저주로 인하여 평생을 수고하여야 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것이며 취함을 얻을 것(창3:17-19)이라는 성경구절을 읽고 묵상하며 노동 그 자체는 사단이 들어온 뒤로 온 저주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에덴동산에서는 일하지 않았을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며 결국 업은 저주의 산물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일은 적게 해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달랐습니다. 루터는 천지창조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천지창조 후 인간에게 맡긴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저 아담에게 이름만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하나님은 천지를 완벽하게 창조하신게 아니라 사람에게 '번성, 다스림, 정복' 이라는 "문화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창조때부터 일을 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문화명령을 수행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저주 받아 사람에게 노동의 저주를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은 노동을 허락함으로 생존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변질 되면서도 일관되게 노동을 허락함으로써 고통 속에서 갱계를 어지만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단,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노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나태를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나태는 하나님이 원하는 문화명령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익히 들었던 루터의 멋짐을 직접보게 되면서도 더욱이 내가 업을 가지는 이유와 의미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더 나아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에 나의 업이 쓰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주밖에 될 수 없었던 나의 업이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 나의 삶에 대한 정의가 새로워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욱이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 "문화명령" 을 완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과 기도가 시작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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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노동영성

임성근 지음 / BSP